북두칠성北斗七星을 본떠 일곱 개의 구멍이 뚫려있으며, 염습殮襲한 시신을 눕히기 위해 관棺 속 바닥에 까는 얇은 널판.
仿照北斗七星鑿了七個孔,在棺底會鋪的一塊薄木板。
내용
사람이 죽어서 시신을 입관할 때 지역에 따라 바로 입관하기도 하고 칠성판七星板에 묶어 입관하기도 한다.
為死者穿衣入棺時,有些地區會直接入殮,有些地區還會綁在七星板上入殮。
염습한 시신을 안치하기 위해 관 바닥에 까는 칠성판은 송판으로 만드는데, 길이와 너비는 관의 크기에 맞추어 만든다. 두께는 대개 다섯 푼 정도이며, 북두칠성 모양으로 7개의 둥그스름한 구멍을 뚫고 옻칠을 한다. 칠성판 위에 시신을 눕히고 칠성칠포, 즉 일곱 자 일곱 치로 된 베로 감는다.
이익李瀷(1681~1763)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칠성판은 방상方相이나 무덤 앞에 세우는 석인石人처럼 묘터의 지기地氣를 억누르거나 사귀邪鬼를 쫓기 위한 것이며, 칠성판에 북두칠성 모양의 구멍을 뚫는 이유는 죽음을 관장하는 북두신北斗神에게 빌어 죽음을 구제받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칠성판은 전한前漢 대에 왕망王莽이 북두칠성의 위엄을 빌려 군대를 압복시키기 위해 다섯 섬의 구리로 두 자 반 정도 크기의 북두칠성 모양을 만들어 ‘위두威斗’라고 한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이능화李能和는 『조선도교사朝鮮道敎史』에서 “우리 조선 풍속에 사람이 죽으면 송판에 일곱 구멍을 뚫어서 북두 형상과 같이 만들거나 종이에 북두 형상을 그려서 시신을 받쳐 놓는데, 이것을 ‘칠성판’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유장원柳長源(1724~1796)이 지은 예서禮書인 『상변통고常變通攷』에서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말을 빌려 칠성판에 북두 형상으로 구멍을 뚫는 까닭이 “남두성은 인간의 삶을 맡고 북두성은 인간의 죽음을 맡기 때문南斗司生 北斗司死故”이라고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석관을 쓸 때에 칠성판을 사용하지 않았다. 상례를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거하여 치르기 시작한 조선 초부터 칠성판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주자가례』에서는 초상에 칠성판을 쓴다고는 하였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청동기시대 고조선 사람은 무덤인 고인돌 뚜껑 위에 북두칠성을 새겨 넣었다. 이를 본받은 고구려 사람은 무덤 속에 북두칠성을 크게 그려 넣었으며, 고려 사람도 무덤 속에 별자리를 그렸는데, 북두칠성을 더욱 중요하게 그렸다. 이처럼 고려 후기까지 고인돌과 무덤 속 천정 등에 표현되던 북두칠성은 조선조에 이르러 칠성판으로 그 모습이 전이되어 나타났다. 다시 말해, 칠성판은 고려 후기까지 고분에 나타났던 북두칠성 별자리 그림의 또 다른 연속적 양상으로 볼 수 있다. 조선조 이후 상례에 비로소 등장하는 칠성판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인간을 또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존재로서 북두칠성을 신앙하던 관념을 반영하고 있다. 즉, ‘삶—죽음—무덤(북두칠성)—불멸 염원’이라는 관념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특징 및 의의
북두칠성은 산신山神과 함께 우리 민속에서 중심적인 신앙 대상이다. 그래서 북두칠성에 있는 삼신할머니에게 명줄을 받아 태어난다고 생각했고, 죽으면 북두칠성을 본떠 넣은 칠성판을 지고 저승길에 가야만 염라대왕이 받아준다고 믿었다. 칠성판에는 북두칠성이 사람의 수명을 주관하며 망자를 내세로 인도하는 존재라는 믿음이 담겨 있다.
참고문헌
성수신앙의 일환으로서 북두칠성의 신앙적 화현 양상(김만태, 동방학지159,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12), 조선도교사(이능화, 동국대학교, 1959), 풍수로 보는 우리 문화 이야기(정종수, 웅진닷컴, 2000), 한국 민속의 세계2(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1).
출처 국립민속박물관